판사가 던진 주사위가 형량을 2.5개월이나 바꿔버렸다는 결과다

판사는 증거와 법리에 따라 형량을 정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나온 숫자라면 판단에서 쉽게 걷어낼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은 완전히 빈자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먼저 들어온 정보가 출발점을 만들고, 이후의 생각은 그 주변에서 움직입니다. 숫자에는 특히 강한 힘이 있습니다.
무작위 숫자가 형량을 움직일 때

독일 법률가들은 조작된 주사위를 던진 뒤 가상의 사건에 형량을 정했습니다. 주사위에서는 3이나 9만 나왔습니다. 사건의 증거나 피고인의 사정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숫자였습니다.
그런데 3을 본 법률가들은 평균 5.28개월을, 9를 본 법률가들은 평균 7.81개월을 선고했습니다. 차이는 2.53개월이었습니다. 전문적인 판단을 훈련받은 사람들조차 무작위 숫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 결과가 보여주는 핵심은 주사위가 형량의 근거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관련 없는 숫자도 머릿속에 기준점을 만들 수 있고, 이후의 추정이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처음 놓인 닻은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니얼 카너먼은 이를 앵커링 효과로 설명합니다. 처음 제시된 숫자가 닻처럼 자리 잡으면 사람은 정답을 처음부터 새로 계산하기보다, 그 숫자에서 충분하다고 느끼는 만큼만 조정하기 쉽습니다.
더 까다로운 점은 숫자가 터무니없거나 근거 없다는 사실을 알아도 영향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숫자를 의심하는 일과 그 숫자가 만든 기준점에서 벗어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숫자를 아예 보지 않는 것도 어렵습니다. 채용 공고에는 연봉 범위가 있고, 집을 구할 때는 보증금과 월세가 먼저 제시됩니다. 중고 거래에서는 판매자가 부른 가격이 대화의 시작점이 됩니다. 그렇게 먼저 나온 숫자는 협상의 보이지 않는 중심이 됩니다.
연봉 협상 전에 내 숫자를 정해야 하는 이유

첫 연봉 협상에서 회사가 낮은 금액을 먼저 제시하면, 우리는 그 액수가 적절한지 묻기보다 그 주변에서 얼마나 올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쉽습니다. 협상의 범위 자체가 상대가 놓은 닻 안에서 좁아지는 셈입니다.
이를 피하려면 협상 전에 비슷한 역할과 조건의 사례를 살펴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와 그 근거를 숫자로 정해두어야 합니다. 이미 들은 숫자를 억지로 잊으려 하기보다 독립적인 기준점을 먼저 세우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처음 들은 숫자를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제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숫자는 어디에서 왔는지, 비교할 범위는 무엇인지, 숫자를 보기 전의 내 기준은 무엇이었는지를 차례로 물으면 판단의 출발점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생각에 관한 생각 ·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은 빠른 직관과 느린 사고가 판단을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합니다. 앵커링부터 손실 회피까지, 선택 뒤에 숨어 있는 오류를 통해 우리가 왜 근거 없는 출발점에도 흔들리는지 보여주는 판단과 선택의 고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