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위 룰렛 숫자가 유엔 통계 추정치를 20%포인트 바꿨다

숫자는 객관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숫자를 보는 순간, 판단에 쓸 만한 정보부터 얻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질문과 아무 관련이 없어도 결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 소개된 한 실험은 그 허점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참가자들은 단지 룰렛을 돌린 뒤 유엔 통계를 추정했지만, 룰렛이 가리킨 숫자는 그들의 답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무관한 숫자가 기준이 되는 순간

실험의 룰렛은 10이나 65에서 멈추도록 조작돼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참가자들에게 룰렛을 돌리게 한 다음, 유엔 회원국 가운데 아프리카 국가가 차지하는 비율을 물었습니다. 룰렛 숫자는 이 질문의 정답과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0을 본 집단과 65를 본 집단의 추정치는 뚜렷하게 갈렸습니다. 응답의 중앙값은 각각 25%와 45%였습니다. 무작위로 제시된 숫자 하나가 통계 추정을 20%포인트나 벌려놓은 것입니다. 이 실험은 Science에 실렸습니다.

이처럼 먼저 접한 숫자가 이후 판단의 출발점을 선점하는 현상을 앵커링 효과라고 합니다. 배가 닻을 내리면 그 주변에서만 움직이듯, 사람의 판단도 처음 주어진 값 부근에 머무는 경향을 보입니다.
우리는 첫 숫자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만은 않습니다. 나름대로 높이거나 낮추며 답을 수정합니다. 문제는 그 조정이 충분히 멀리 나아가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숫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기 어렵고, 전문성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협상 테이블에 먼저 놓인 숫자

앵커링은 퀴즈보다 현실의 협상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연봉 협상에서 상대가 낮은 금액을 먼저 제시하면, 논의는 어느새 그 숫자 주변에서 시작됩니다. 원래 기대했던 금액이 있었더라도 제시액을 조금 올리는 범위에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카너먼은 협상 테이블에 등장한 모든 숫자가 닻 효과를 낸다고 가정하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첫 숫자를 무시하겠다는 다짐만이 아닙니다. 제안을 듣기 전에 원하는 범위와 그 근거를 미리 정해두어야 상대의 숫자를 기준으로 삼지 않을 수 있습니다.

판매자가 제시한 최초 가격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큰 폭으로 할인됐다는 표시는 현재 가격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처음 붙은 가격 자체가 적절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할인율보다 먼저 필요한 물건인지, 내가 정한 예산 안에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연봉이라면 시장 자료와 자신의 성과를, 집값이라면 비교할 만한 매물을 먼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목표는 숫자를 전혀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이 건넨 숫자보다 관련성이 높은 숫자로 새로운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내 판단의 출발점을 되찾는 법

구체적인 숫자는 정밀하고 객관적인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숫자가 세밀하다는 사실과 출발점이 타당하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가장 먼저 들은 숫자가 무엇이었는지, 그 숫자에 실제 근거가 있는지 분리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판단을 지키는 방법은 더 강하게 확신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숫자가 제시되기 전에 기준을 만들고, 비교 자료를 준비하며, 처음 본 값에서 충분히 떨어져 다시 계산하는 데 있습니다. 협상 실력보다 먼저 본 숫자가 더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각에 관한 생각 ·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은 빠른 직관과 느린 사고가 우리의 판단을 어떻게 만드는지 다룹니다. 앵커링을 비롯한 여러 편향의 실험을 통해,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믿는 생각에도 빈틈이 생기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저자 대니얼 카너먼은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입니다. 이 책은 숫자와 선택을 대하는 자신의 습관을 점검하고 싶은 독자에게 판단의 기준을 되찾을 단서를 건넵니다.
